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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활약은 한국 테니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다. 사진= GettyImagesKorea

정현의 활약에 가려 보이지 않는 한국 테니스의 어두운 그림자

박준용 기자
201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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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코리아= 박준용 기자]정현(한국체대, 삼성증권 후원)이 호주오픈 8강을 확정 지은 날 중국의 한 기자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한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은 2010년 중국에서 열린 14세 이하 아시아 시리즈 시상식으로 당시 정현은 첸신(중국)에게 져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 속 앳된 얼굴의 정현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다.
 
중국 기자는 "준우승자였던 정현은 호주오픈에서 승승장구하지만 우승자 첸신은 현재 베이징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레슨 코치를 하고 있다"면서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이어 그는 "현재 중국은 다양한 주니어 선수를 육성하기보다 매년 최고의 선수 한 명을 뽑아 그 선수만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분명 한계가 있어 보인다"면서 한국 테니스의 주니어 육성 시스템에 대해 물었지만 기자가 할 수 있는 말이 딱히 없었다.
 
2010년 중국에서 열린 14세이하 국제주니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정현(왼쪽)과 우승자 첸신. 정현은 프로에 데뷔해 호주오픈 4강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지만 첸신은 현재 동호인 레슨을 하고 있다.
 
정현 활약이 테니스붐으로 이어질까
정현이 호주오픈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 4강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하며 세계 테니스를 깜짝 놀라게 했다.
 
종전 한국 선수의 그랜드슬램 최고 성적은 US오픈에서 기록한 이덕희 여사(1981년)와 이형택(2000년, 2007년)의 16강이었다. 이덕희 여사가 16강에 진출했을 때는 사회 분위기와 프로 테니스에 대한 무지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못했고 이형택이 두 차례 16강에 진출했을 때는 한국 테니스인들의 잔치였다.
 
하지만 정현의 4강은 테니스를 모르는 사람들도 뜨거운 관심을 가질 정도로 모든 국민의 잔치였다. 일각에서는 박세리, 박태환, 김연아 등 스포츠 영웅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특히, 4강에서 로저 페더러(스위스)에게 기권한 후 자신의 SNS에 올린 속살이 드러난 발바닥 사진은 전 국민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고 위트 섞인 유창한 영어 인터뷰와 재치 있고 유쾌한 그의 입담은 테니스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테니스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큰 작용을 했다.
 
빠르고 강한 세계 테니스는 그동안 체격 조건이 서양 선수보다 열세인 아시아 선수에게 높은 장벽과 같았다. 이를 뛰어 넘은 선수가 중국의 리나와 일본의 니시코리 케이다.
 
리나는 2011년 프랑스오픈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 우승을 차지했고 2014년 호주오픈에서 다시 한번 정상에 올랐다. 니시코리는 2014년 US오픈에서 아시아 남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그랜드슬램 결승에 진출했다.
 
중국과 일본이 세계 무대에 근접한 사이 한국 테니스는 여전히 변방에 머물렀다. 이형택 은퇴 후 길고 긴 어둠의 터널에 갇힌 한국 테니스를 구한 선수가 바로 정현이다.
 
정현이 몰고 온 열풍은 가히 신드롬 수준이다. 강력한 한파에도 불구하고 정현이 사용하는 라켓의 판매량이 급증했고 정현이 호주오픈에서 입었던 의류는 완판을 기록했다. 코트에는 레슨 문의 전화가 쇄도하는 등 테니스 관련 산업이 오랜만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하지만 한국 테니스의 속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제2의 정현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
1908년 4월 탁지부(현재 기재부) 관리들이 친목도모를 위해 회동구락부를 조직해 테니스를 즐긴 것이 우리나라 테니스의 시초라 알려졌다. 이후 한국 선수가 그랜드슬램 16강에 처음 진출하는데 무려 73년이 걸렸고 이 기록을 깨는데 37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렇듯 우리나라 선수가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은 가뭄에 콩나듯 했다.
 
변하지 않는 한국 시스템에서 정현같은 선수가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최근 기자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정현 외에 우리나라에 잘하는 선수는 누가 있느냐?’다. 그들은 LPGA처럼 테니스에서도 정현 외에 더 많은 한국 선수들이 세계 무대를 누비는 모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질문했을 것이다. 질문을 바꿔 ‘제2의 정현을 기대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은 ‘No’다.
 
이유는 한국 테니스 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매우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의 한 고등학교 테니스부 감독이 자신의 아들을 전국체전에 출전 시키기 위해 아들의 상대 선수였던 자신의 제자를 일방적으로 기권패 시킨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빚었고 여자 선수 출신이 어렸을 때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충격을 줬다.
 
무엇보다 지난 2016년 8월 새 집행부가 들어선 대한테니스협회가 선수 지원에 대해 끊이지 않는 잡음의 그림자가 너무 짙다.
 
지난해 협회는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동호인대회 우승 상금보다 못한 금액을 상금으로 지급했고 여자 대표팀은 소집훈련 기간 중 며칠간 트레이너 없이 훈련해야 했다. 또 지난해 초 유럽 투어링팀 특전이 주어지는 U14 아시아테니스선수권에 일방적으로 선수 파견을 거부해 선수들이 흘린 땀과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국제 대회 출전을 독려해야 할 협회가 오히려 출전을 못 하도록 막은 것도 이해하기 힘든데 이 사실을 선수, 지도자, 학부모 등 그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은 것은 더욱 황당하다. 이에 대한 협회의 진솔하고 공식적인 사과와 반성은 없었고 문제 재발 방지 약속도 없었다. 5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롤랑가로스 주니어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보호자와 코치 없이 주니어 선수들만 보내 큰 논란을 빚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정현 같은 선수가 나온 것이 불가사의한 일이다
 
현 집행부는 선수 지원뿐만 아니라 육성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과거 집행부에서는 주니어 육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노력을 해왔다. 조동길 전 회장(재임기간 03년 12월~13년 1월)은 더그 맥커디(미국)를 초빙해 선수 육성에 관심을 가졌다. 이때 주니어 육성팀에 발탁된 선수가 2015년 호주오픈 주니어 준우승자 홍성찬(명지대)과 올해 호주오픈을 통해 처음 그랜드슬램 무대를 밟은 권순우(건국대)다.
 
주원홍 전 회장(13년 2월~16년 5월)은 삼성증권과 우수 선수 육성을 위한 계약을 체결하면서 삼성증권으로부터 3년간 매년 3억원의 선수육성기금을 지원받았다. 주 회장은 이 기금을 정윤성과 홍성찬 등 당시 유망주들을 위해 투자했다. 또한 주 회장은 정현이 삼성증권의 후원을 받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현 집행부는 과거 집행부와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오직 선수 육성을 위해서만 사용하게 되어 있는 삼성증권의 우수선수육성기금을 빼내 장충장호테니스장 사용료로 지불했고 심지어 삼성증권과 사전에 협의했다는 거짓말까지 했다. 게다가 갈수록 테니스 선수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협회는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현 집행부의 재정난에 있다. 곽용운 대한테니스협회장은 전임 회장들과 달리 출연금을 내놓지 않아 협회 살림은 팍팍해졌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곽 회장은 자신은 물론 제 식구 챙기기에는 아낌없이 쓰고 있다.
 
곽 회장은 ‘그랜드슬램 참관비는 사비로 충당’이라는 자신이 내건 공약과 달리 지난해 프랑스오픈, US오픈 그리고 올해 호주오픈 참관 비용을 협회 예산으로 사용했고 심지어 자신의 외조카 호주오픈 참관비용도 협회 예산을 사용했다.
 
또 지난해 10월 협회 홍보이사가 편집국장으로 재직 중인 매체가 주관하고 전국 시도 11명의 지도자가 참여한 ‘상하이마스터스투어단’에 1천만원이 넘는 예산도 협회가 충당했다. 테니스코리아 2018년 1월호에 게재된 이진수 코리아오픈 토너먼트 디렉터의 인터뷰 기사에 대해 협회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 요청을 하였다가 중재위로부터 “무엇을 정정보도 해달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지난 1월에 열린 정기대의원총회가 행정착오로 인해 다시 열리게 되는 해프닝은 아마추어 집행부의 애교쯤으로 보여질 정도다.
 
대한테니스협회 발 이슈가 터질 때마다 보인 집행부의 반응은 사안의 중대성과 심각성에 대한 무관심, 무책임 그리고 고발이다.
 
정현의 4강이 대한테니스협회 집행부의 잘못을 덮을 기회라고 판단하면 큰 착각이다. 현 집행부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지 않으면 정현의 4강으로 한국 테니스가 정말 어렵게 잡은 모멘텀이 ‘한여름 밤의 꿈’으로 그칠 뿐만 아니라 제2의 정현을 만나는데 또 수십 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글= 박준용 기자(loveis5517@tennis.co.kr], 사진= 테니스코리아,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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